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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 - 서경식

오직~ 2012. 10. 24. 10:07

기분좋게 화창한 가을날 오후, 도쿄 교외 철도역에서 오랜만에 쇼지 쓰토무 목사를 만났다. 편찮으신 사모님 안부부터 물어보니 요즘 많이 회복됐다고 했고, 목사님 표정도 평온해 보였다. 사모님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지원과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앞장서온 쇼지 루쓰코 씨다.

 

“나도 이제 80입니다”라고 목사님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목사님과 내가 만난 지 얼추 40년이 됐다. 1971년 4월20일 한국 육군보안사령부는 내 형들인 서승과 서준식을 ‘학원침투 간첩단’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나는 그때 만 20살의 와세다대 학생이었다.

 

형들의 동창생이나 지인들이 시작한 구원운동은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다. 당시 쇼지 목사는 와세다대 와이엠시에이(YMCA) 학생기숙사 사감이었다. 그때는 학생운동 절정기였다. 기독교계 학생단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구원운동에 협력해달라고 쇼지 목사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학생들은 반공 독재체제하의 한국에서도 목사는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했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형들과 아무 연관도 없었고, 나와도 일면식이 없던 쇼지 목사는 학생들 요구를 받아들여 그 곤란한 역할을 떠맡았다. 당시 학생들 중 다수는 젊은 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이익 지키기에 급급하다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됐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지난 40년을 살아온 쪽은 목사님이다.

 

쇼지 목사는 원래 자신이 고생한 얘기는 하지 않는 분이어서 그의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이번에 처음 들었지만,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옙스키를 탐독하고 실존주의에 경도돼 있던 그는 정치엔 별로 관심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돌연 신학으로 진로를 바꾼 뒤 1960년대 후반에 유학한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베트남 반전운동을 접한 것이 전환의 계기가 됐다.

 

1971년 12월8일 쇼지 목사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형들을 면회하려고 처음 한국을 찾았다. 그것이 한국과 긴 인연을 맺는 출발점이 됐다. 유신체제에서 발표된 ‘1973년 한국 기독자 선언’에 크게 공감한 그는 일본에서 납치당한 김대중씨 구출운동을 비롯해 한국 민주화 지원 연대운동을 계속했다.

 

1996년 쇼지 목사 부부와 우리 부부는 함께 이스라엘을 여행한 적이 있다. 목사인 그에게 그곳은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특별한 장소였다. 일본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간사였던 그에게 이스라엘 정부가 몇 번이나 초대장을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재임 중에는 초대를 사절했고, 퇴임 뒤 자비로 찾아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때 예루살렘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쇼지 목사가 불쑥 지난 일을 떠올렸다. “이제 시간이 지났으니 얘기해도 괜찮겠지요. 실은 그때 사감 숙사 2층에 미군 탈영병 한 사람을 숨겨놓고 있었어요….” 그때란 바로 ‘서씨 형제를 구출하는 모임’ 대표를 맡고 있던 무렵이다. 25년이 지난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는 그 얘기를 했다.

 

80살을 넘긴 지금도 그는 변함이 없다. 원전 문제든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든 기독교계가 무관심하거나 불투명한 점을 조용히 비판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나는 너무 타협을 몰라서 다른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이건 내 결점이라고, 이 나이가 돼서야 반성하고 있습니다.”

 

40년간의 교류를 되돌아보며 나는 굳이 대꾸를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기준이다’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분입니다.”

 

일본은 지금 전후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나는 내 예감이 빗나가기를 충심으로 바라며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가 파시즘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고 썼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내가 예감한 대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시대일수록 일본 사회 일각에 쇼지 목사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 번역 한승동 기자

20121023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