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한글역주2
서구문명의 뿌리는 희랍문명에 선행하는 페니키아문명에 있다. 페니키아인들이 BC 15세기에 발명한 문자(22글자의 알파벳)가 희랍문자의 모태가 되었고 오늘 영어 알파벳의 조형이 되었다. 예수는 율법에 쩔은 유대인들보다 개방적 페니키아(시리아)인들을 더 사랑했다.
"페니키아"라는 말 자체가 후대에 희랍인들이 명명한 것이며, 그들 자신은 가나안이라고 불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동경했던 그 가나안이 페니키아의 별칭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페니키아 시리아문명에 속한 에데사왕국의 아브가르왕이 갈릴리의 예수를 초청했다는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며 제자인 도마는 예수의 사후 에데사왕국으로 갔고 거기서 도마기독교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되어지지도 않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
사랑할 때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서는 안되리라, "신이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라.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노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사랑하는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수고로움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나니.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있지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거늘.
너는 진실로 자유로우리라.
너의 낮이 근심으로 가득차고 너의 밤이 욕망과 슬픔으로 범벅이 되는 바로 그때에
이런 것들이 너를 칭칭 감으나 네 스스로 발가벗고 사슬을 끊고
이들 위로 솟아오를 그때에 너는 진실로 자유로우리.
너는 네 몸뚱이와 하나가 되었을 때 선하다.
그러나 네가 네 몸뚱이와 하나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내분(內分)된 집이라 하여 그것은 도둑의 소굴은 아니다, 오직 내분된 집일 뿐.
기도란 게 무엇이뇨? 생명의 하늘 속에 너 스스로를 활짝 펴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뇨?
허공 속에 너의 어둠을 쏟아 버리는 것이 너의 안락이라면
너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새벽빛을 쏟아버리는 것 또한 너의 기쁨이리라.
죽음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느뇨?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낮에는 멀고 밤에만 뜨는 올빼미는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나니
그대 진실로 죽음의 혼을 보고자 한다면
생명의 몸을 향해 너의 가슴을 활짝 열라!
삶과 죽음은 한 몸,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희망과 욕망의 심연 속에 저 너머 세상의 고요한 깨달음이 조용히 출렁이도다.
알미트라는 말이 없었다. 안개 속으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면서.
그리고 사람들 모두 흩어질 때까지. 그녀는 홀로 방파제 위에 서서
그녀의 가슴속에 새겨진 그의 말들을 되새겼다.
"잠깐, 바람 위에 일순의 휴식이 오면 또 한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Kahlil Gibran)
아타락시아 = 안식 = 해탈
콥트어의 등장은 이집트가 기독교국가로 변해버렸다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사태
아랍인들은 997년 공식적으로 콥트어를 금지시켰다.
도마복음서는 살아있는 예수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예수에게는 죽음의 전제가 없기 때문에 부활도 있을 수 없다. 부활을 운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승천도 재림도 있을 필요가 없다. 일체의 신화적 장치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
이 내 몸이야말로 천국인 것이다. 이 천국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 몸 속에 있는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뜻이다. 내 몸의 천국 속에서 나는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호랑이나 느티나무가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만들 뿐이다. 왜? 인간이 자기 몸의 왕노릇을 할 수 없을 때, 내가 나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다스리지 못할 때, 끔찍한 우주의 모든 죄악이 파생하는 것이다. "나"라는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구함과 찾음과 고통과 경이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어린아이는 어른의 작은 형태가 아니다. (A child is not a small adult.)
어른과 아이는 객체화된 개체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Self)의 측면들이다. 나 속에 내재하는 아키타입들인 것이다. 어른이란 노자가 말하는 죽음의 무리며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하향(下向)이다. 아이란 삶의 무리며 상향(上向)이다. 아이가 어른을 따를수록 죽음의 무리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며, 어른이 아이를 따를수록 삶의 무리가 생명을 향해 상향의 길을 더듬는다. 천국이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로 역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다. 천국은 가치의 전도이며 시간의 반역이다.
사람이 늙는다고 하는 것은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제일적(齊一的)으로 늙는 것이 아니요, 항상 하향과 상향이 길항관계에 있으면서 늙어가는 것이다. 하향과 상향의 긴장 속에서, 결국 하향이 상향보다 더 진행되는 만큼 인간은 노화(Aging)하는 것이다. 아이와 어른은 내 몸속에 공존하는 긴장관계이다...
마르고 딱딱해져만 가는 것이다. 고정된 관념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일시적 체험 하나로 그 체험의 전후 역사적 맥락을 전혀 반추하지 않은 채, 그 체험을 하나의 고정된 관념으로 만들고 전설로 만들어 모든 궐후(厥後)의 자기 주변상황에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다.
"네 눈앞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그리하면 너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이 다 너에게 드러나리라.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원자폭탄을 만들어 내는 현대물리학이 살아있는 풀 한 포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죄악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 속에 있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다.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실패와 좌절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풍요로운 수확을 기다려야 한다...선악의 이원론이나 천당과 지옥의 대결이 없다. 결국 씨 뿌림에는 풍요로운 결실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자연론적 낙관주의가 숨어있는 것이다.
인생의 과제는 오늘 여기 이 땅위에서 네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궁극적인 어떤 구원, 해탈, 열반, 천국의 실체화는 허망한 기만에 불과할 수가 있다. 하나님과도 같은, 궁극적인 어떤 "실체"가 인생의 목표라는 모든 생각을 도마는 여지없이 무산시켜버리고 만다.
인간은 결코 개념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개념적 인식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고착성이다. 고착적 개념은 그릇된 욕망을 자아낸다. 인간의 과도한 분별지(分別智)는 항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지만, 고착된 개념을 향한 집착은 인간을 독선과 오만과 번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종말(end)이란 시간의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의 완성(consumma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적 표현에서도 끝(end)이라는 뜻은 항상 목적(end)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의 죽음은 나의 삶의 완성이며 나의 존재가치의 목적이 될 수 있다.
☆ 도마복음한글역주2
- 김용옥 / 통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