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홍콩은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난징조약이 체결된 직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아편전쟁은 19세기 제국주의의 기준으로 본다 해도 대단히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은 국민들의 차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늘어나면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무역 적자를 메우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은 중국에서의 아편 판매가 불법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무역 수지의 균형을 잡으려는 자신들의 숭고한 대의가 방해받는 일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1841년 영국 정부는 중국 측이 불법적인 아편 화물을 압수하자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에서 대패한 중국은 난징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자국의 관세 자주권을 포기해야 했다. 아편전쟁은 자칭 '자유'무역의 선도자가 자국의 마약 불법거래를 방해했다는 이유로다른 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당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링컨이 1862년에 노예 제도를 철폐한 것은 도덕적인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조처였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이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각국은 경제 발전이 초기 단계에서 국영 기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기업은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의 시동을 걸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국영 기업은 '자연 독점'이 있는 분야에도 설립될 수 있다. 자연 독점은 기술적인 조건 때문에 공급자를 하나만 두어야 시장의 요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을 이르는데, 전기, 수도, 가스, 철도 그리고 전화 같은 것이 자연 독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똑똑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물건을 발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으로 매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인 동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안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그 밖에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허는 발명과 발견을 촉진할 수 있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과학적 호기심과 인류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욕망은 전체 인류 역사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특허의 경우 제약을 비롯한 화학, 소프트웨어, 연예 등 비교적 복제가 용이한 특정 산업의 경우에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산업의 경우에는 신기술을 복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 때문에 특허법이 없다 해도 혁신을 이룬 발명가에게는 자동적으로 일시적인 기술적 독점이 주어진다.
대부분의 산업에는 이런 자연발생적 우위로 인한 일시적 독점 이윤만으로도 혁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된다. 이것이 바로 19세기의 특허 반대론이 주장했던 유명한 논거였고..
지적소유권 보호 제도의 가장 치명적인 영향은 경제 발전을 위해 선진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술 후진국으로 지식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 발전의 핵심은 선진적인 외국 기술의 흡수이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적소유권 제도가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박차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이작 뉴턴은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뉴턴의 이 말은 아이디어는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뜻이다.
결국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적소유권 보호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필요성과, 지적소유권으로 인한 독점 때문에 빚어지는 손실이 새로운 지식이 가져오는 이익을 넘어서지 않도록 보장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지적소유권 보호의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지적소유권 보호 기간을 단축하고, 독창성 기준을 높이고, 강제 인가와 병행 수입의 조건을 완화해야 한다.
국제적인 지적소유권 제도가 개발도상국들이 새로운 기술적 지식을 합리적인 비용으로 획득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려운 것은 지적소유권을 완전히 폐지할 것이냐 하니면 철저하게 강화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소유권 보유자들의 이해관계와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혹은 세계의 나머지 구성원들-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순조로운 경제 성장을 위해서 물가 상승률이 반드시 스탠리 피셔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원하는 1~3% 범위 이내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극심한 물가 상승은 해롭지만 (40%까지의) 적당한 물가 상승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며 심지어 급속한 성장 및 고용 창출과 양립할 수도 있다.
낮은 물가 상승률은 노동자들이 이미 벌어 놓은 것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데 필요한 정책은 노동자들이 미래에 벌 수 있는 기회를 감소시킬 수 있다. 물가 상승률을 낮은 수준, 그것도 대단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엄격한 금융, 재정 정책은 경제 활동의 수준을 저하시킬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노동 수요의 감축, 실업 증대, 그리고 임금 감소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물가 통제는 노동자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강조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권장하는 신자유주의의 거시경제학의 핵심 주제이다.
IMF는 개발도상국 정부가 경제 순환 주기나 장기간 개발 전략과 상관없이 매년 회계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와 성장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거시경제 정책을 개발도상국에서 강요하고 있다. '세입을 초과한 지출'을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비난하는 그들의 태도는 개발도상국들이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투자를 위한 차입'을 하는 것을 막고 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사람들을 싸잡아서 비난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 개발이나 자녀 교육에 투자하기 위해서 대출을 받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 된다.
미국의 원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엄격하고 지나치게 집중화된,그리고 부정직한 관료들이 존재하는 사회보다 더 나쁜 사회가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엄격하고 지나치게 집중화된, 그리고 정직한 관료들이 존재하는 사회이다."는 유명한 진술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경제의 탈정치화를 독촉하는 것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손에서 모든 중요한 결정들을 빼앗아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구에 속하는 선출되지 않은 기술 관료들의 손에 넘긴다면, 민주주의를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자유 시장을 촉진하고, 자유 시장은 다시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견해는 대단히 문제가 많다.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사이에는 강한 긴장이 있으며, 자유 시장이 경제 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일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면, 이것은 대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처럼 자유 시장의 촉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려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화가 불변의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로 변화하는 것,,
경제 발전은 그 자체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필요로 하는 문화를 창조해 낸다.
문화는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만, 경제 발전은 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역사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근본적으로 나누어 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부자 나라들의 우수한 제조업 능력이라는 사실을 되풀이 보여주고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 (2007/10)
-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