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

자전거 여행2

오직~ 2011. 2. 1. 12:06

몸은 풍경 속으로 퍼지고 풍경은 마음에 스민다.

 

다가오는 시간과 사라지는 시간이 체인의 마디에서 만나고 또 헤어지면서 바퀴는 구른다.

자전거를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몸을 떠난 힘은 흙 속에 녹아서 보이지 않는다.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린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있다.

 

무위자연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 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겨우 이해하고 있다.

 

인간에게 절실한 것들, 인간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사소해서 위태롭고, 마침내 변해야 하는 것들은 높고 강력하다.

 

생명은 무너져가는 과정에서조차도 그 고유한 질서를 완성한다.

 

나는 너의 존재와 너의 위치에 의해서 나 자신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다. 인간이 역사를 건설하고 삶을 영위하는 이 3차원의 공간 속에서 내가 나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외에는 없다. 내가 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점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다.

나에게 나의 위치를 가리켜주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이며, 이 세계이며, 이 세계의 표식물들이다. 그 사이에서 작동되는 신호에 따라서 선박은 대양을 건너가고, 인간에게는 이동과 소통이 가능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호가 가장 아름답다. 신호는 나 자신을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자의 슬픈 울음과도 같다.

 

젊음은 바깥쪽을 둘러싸고 늙음은 안쪽으로 고인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하나의 핵심부를 중심으로 여러 겹의 동심원을 이루는 세대들의 역할 분담과 전승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이테를 들여다 보는 일의 기쁨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곧게 서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 무위의 중심이 곧게 서지 못하면 나무는 쓰러지고 거죽의 젊음은 살 자리를 잃는다.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의 바쁜 현장인데, 새로운 세대의 표충이 태어나면 생성과 존재가 사명을 교대하면서 나이테는 하나씩 늘어간다.

 

 

 

 

 

☆ 자전거 여행2

       - 글 김훈, 사진 이강빈 / 생각의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