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재구성
■ 신군부의 단계별 쿠데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유신 독재체제가 붕괴하자,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 군벌, 이른바 신군부는 12월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납치·구금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권력을 장악했다. 정권 탈취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1980년 5월13~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를 요구하며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는 등 민주화 요구가 커지고 정치권에서도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 논의가 진전되자, 신군부는 5월17일 미리 준비해둔 각본대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됐고,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비롯한 정치인, 재야인사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전국의 대학, 국가기관, 언론사 등에 계엄군이 주둔했다. 광주에는 특전사 7공수여단 33·35대대가 진주했다.
■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광주, 18~20일) 5월18일 오전 10시께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대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벌인 시위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맞서며 시내 중심가로 번졌다. 오후 4시께 “전원 체포” 명령과 함께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이 시작됐다. 공수부대원들은 건물 안으로까지 들어가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 등으로 때리고 발로 짓밟는 등 폭력을 휘둘러 많은 사람이 다치고 숨졌다. 신군부는 18일 11공수여단, 20일 3공수여단을 증파하는 등 강경진압을 이어갔으나, 무차별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은 되레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20일에는 도청 앞에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해 공수부대가 총을 쏘기도 했다.
■ 계엄군의 발포와 시민군의 등장(광주, 21일) 공휴일인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모여든 시민들에게 계엄군이 조준 사격을 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최소한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시민들은 텅 빈 경찰서 등에서 총을 가져와 스스로 무장하고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22일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뒤 통행을 막아 광주를 고립시켰다. 이때 지나다니는 차량,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에게까지 무차별 사격을 해 많은 사람들이 숨졌다.
■ 광주의 고립과 시민 자치(광주, 22~27일)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 시내에서는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해 혼란스러운 상황을 추슬렀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돕는 등 이른바 ‘시민 자치’가 나타났다. ‘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사 쪽에 문제 해결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언론 통제와 연락 두절로 실상을 널리 알릴 수도 없었다. 26일 계엄군의 진압이 예고되자 시민군을 지휘하던 항쟁지도부는 대부분의 시민들을 귀가시킨 뒤 157명만이 도청에 남아 최후 항전을 준비했다.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은 1시간30분 동안의 교전 끝에 도청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 시민군들이 죽거나 생포됐다. 열흘에 걸친 광주항쟁 기간 동안 발생한 피해자는, 정부 통계로만 봐도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 70명, 부상자 3028명에 달한다.
■ 신군부, 광주를 딛고 정권 탈취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조준 사격을 하던 5월21일,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해 광주항쟁을 간첩인 김대중이 사주해 일으킨 폭동으로 몰아갔다. 이를 빌미로 전두환은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상임위원장에 앉았다. 8월에는 ‘체육관 투표’라 불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 투표를 거쳐 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역사 바로세우기 1988년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받았고, 국회 광주청문회에서는 ‘폭동’으로 왜곡됐던 광주항쟁의 진실이 드러났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책임자 처벌이 기대됐으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논리 등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전국민적 반발을 불렀다. 이에 떠밀려 1995년 말 ‘12·12,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신군부 주역 17명이 법정에 섰다. 1997년 최종심에서 전두환은 내란죄·군사반란죄 수괴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17년을 판결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사면됐다.
20100517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