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

월든 (Walden)

오직~ 2010. 3. 24. 00:15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의 인생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이른바 체념이라는 것은 확인된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

 

'자발적인 빈곤'

 

나는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 벨벳 방석에 앉아 있느니 차라리 호박 하나를 독차지해서 앉고 싶다.

호화 유람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유독한 공기를 마시며 천국에 가느니,

차라리 소달구지에 올라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땅 위를 돌아다니고 싶다.

 

 

문명인이란 보다 경험이 많고, 보다 현명해진 야만일일 따름이다.

 

나는 빠른 여행자란 자기 발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독서를 잘 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

발돋움하고 서 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

 

 

필요하다면 강에 다리 하나를 덜 놓고, 그래서 조금 돌아서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라도 놓도록 하자.

 

 

꽃처럼 활짝 핀 어느 순간의 아름다움을, 육체적 일이든 정신적 일이든 일을 하느라 희생할 수는 없는 때들이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이 있기를 원한다.

여름날 아침에는 간혹, 이제는 습관이 된 멱을 감은 다음, 해가 잘 드는 문지방에 앉아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한없이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런 나의 주위에는 소나무, 호두나무와 옻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과 정적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오직 새들만이 곁에서 노래하거나 소리 없이 집 안을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해가 서쪽 창문을 비추거나 또는 멀리 한길을 달리는 어느 여행자의 마차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시간이 흘러간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소박하고 용기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사계절을 벗삼아 그 우정을 즐기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내 콩밭을 적시면서 한편으로 나를 집에 머물도록 하는 저 보슬비는 지루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 못하지만, 비는 밭 매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비가 계속되어 땅속의 종자들이 썩고 낮은 지대에서 감자 농사를 망치더라도 높은 지대의 풀에게는 좋을 것이며, 풀에게 좋다면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적인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사색을 함으로써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길을 잃고 나서야, 다시 말하면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

 

 

자연에게는 자연을 이해해주는 인간이 없다.

아름다운 깃털을 지닌 새들은 노래를 부르며 꽃들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어떤 청년이나 처녀가 자연의 야성적이고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호흡을 같이하는가?

자연을 놓아두고 천국을 이야기하다니!

그것은 지구를 모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새벽이 되기 전에 근심에서 깨어나서 모험을 찾아 떠나라.

낮에는 다른 호수에 가 있도록 하라. 밤이면 뭇 장소를 그대의 집으로 삼아라.

그대의 천성에 따라 야성적으로 자라라.

사람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평온을 보지 못하는 자는 눈이 멀었나니"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여지껏 발견 못하던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되라"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는 놀라운 일이다.

내가 숲 속에 산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 내 집 문간에서 호수까지는 내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났다.

내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은 지 5, 6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길의 윤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밟아 유지되게 했나보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계의 큰 길은 얼마나 밟혀서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얼마나 깊이 패었겠는가!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

 

 

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수준을 가장 둔한 통찰력에 내려 맞추고는 그것을 상식이라고 찬양하는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의 의무감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진실로 내부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의 창에도 밝게 비친다.

샐비어 같은 약초를 가꾸듯 가난을 가꾸어라.

옷이든 친구이든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헌 옷은 뒤집어서 다시 짓고 옛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라.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나는 내 자신의 본연의 자세에 돌아와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다.

나는 남의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화려하게 과시하며 돌아다니기보다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우주를 창조한 분과 함께 거닐어보고 싶다.

 

 

언제까지 우리는 현관에 앉아서, 해보면 당장 그 부적절함이 드러날 부질없고 케케묵은 미덕을 실천하고 있을 것인가?

 

 

내가 지금 서 있는 숲에는 땅 위에 깔린 솔잎들 사이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면서 나의 시야에서 숨으려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벌레가 그처럼 좁은 소견을 품고서 어쩌면 자기의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벌레의 족속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나로부터 자신의 머리를 감추려드는가 하고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라는 인간 벌레 위에 서 있는 더 큰 '은인', 더 큰 '지성'을 가진 어떤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지루함을 견뎌내고 있다.

 

 

 

 

 

☆ 월든

     - 헨리 데이빗 소로우 -

        강승영옮김/이레

 

 

국가와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서

홀로 2년여를 살았던 삶의 이야기

자급자족하며 온전히 자연에 귀의, 산과 호수와 동물과 눈비바람속에 귀 기울이며

진솔하게 살았던 자신의 내면을 그려내다.

표현의 섬세함이 바로 '시인'이다.

구도자의 삶이 그런 것 아닐까

 

150여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오늘날 그대로 유용한 내용이다.

마침 '법정스님'의 언급도 있어서인가

그 분들의 투박 검소한 삶에 경의를 표하다.

 

해답없는 21c의 혼탁한 생활속에 유일한 구원은

저마다 자연과 더불어 스스로 즐기는

검박(儉朴)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