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의 라지 변호사, 부디 무사하시게 / 서경식
그는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돼 당한 고문에 대해서도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유머의 소유자다. 파타파도 하마스파도 아니고 보편적 인권사상에 입각해 불굴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전세계가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있다”면서도 활달한 어투로 장시간 낙관주의를 설파하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했다.
“내 심장을 핥아보라. 독한 맛이 날 테니까….”
황량한 표정의 노인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그렇게 말한다. 클로드 란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품 <쇼아>(SHOAH)의 한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점령한 폴란드 각지에 게토를 설치해서 거기에 수만, 수십만의 유대인들을 가두어 놓고 음식도 의약품도 충분히 주지 않은 채 굶어 죽게 만들다가 결국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의 절멸수용소로 보내 학살했다. 1943년 4월 바르샤바 게토 안의 유대인 전투조직이 빈약한 무기를 들고 절망적인 반란을 감행했다. 이 봉기는 약 1개월 뒤 진압됐는데, 5만6천여명의 유대인이 붙잡혀 그 가운데 7천명이 섬멸당하고 7천명은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처리됐으며, 5천~6천명은 폭파와 화재로 숨지고 나머지는 각지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에 비해 나치 쪽 사망자는 겨우 16명.
전세계로부터 외면당한 게토 유대인들의 저항은 무참한 대량학살로 끝났다. 이 봉기 뒤에도 세계는 대부분 유대인들의 운명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했다.
첫머리의 말은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의 얘기다.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폐허 속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틀림없이 꼭 같은 말을 입에 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격은 지난해 말에 시작됐고 팔레스타인 쪽에서 1300명 이상이 죽었다. 그 대다수가 아이들과 여성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이다. 이스라엘군이 자행한 일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학살이다. 가자라는 좁다란 지역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군사공격을 가하는 행위는 나치의 게토 공격 바로 그것이다. 나치의 교훈이 이스라엘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의 90% 이상이 이 공격을 감행한 정부를 지지했다. 국제사회는 이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한 달 넘게 세계는 이 대량학살을 그냥 방관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 비열한 학살은 이스라엘 집권당이 미국의 정권 이양기를 노려 자신들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자행했다. 정의와 인도를 조롱하는 이스라엘 국가의 시니시즘(냉소주의)은 이를 방관한 전세계에 만연되고 또 증폭돼 갔을 것이다.
나는 미국이 명분없는 이라크전쟁을 감행한 2003년 여름 일본 오키나와에서 라지 슬라니라는 팔레스타인 사람과 대담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가자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가 출신으로, 이집트와 유럽에서 법률을 공부한 변호사다. 그대로 유럽에서 평온하게 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귀향해서 반이스라엘 운동에 투신했다. 가자 땅에서 지금도 인권변호사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투옥돼, 예컨대 머리부터 자루를 씌워놓고는 그 속에 최루탄을 터뜨리는 지독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고문에 대해서도 “그런 짓을 당해 머리가 이렇게 돼버렸어…”라며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유머의 소유자다. 파타파도 하마스파도 아니고 보편적 인권사상에 입각해 불굴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오키나와에서 나와 대담할 때 “전세계가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있다”면서도 활달하고 힘찬 어투로 장시간 낙관주의를 설파하면서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지난해 말 이스라엘이 공격을 시작한 이래 그 라지가 일본의 지인들 앞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현지 사정을 연일 보고해왔다. 지금 어디가 공격당하고 있다, 지금 몇 사람이 죽었다, 그런 보고 메일을 읽으면서 나는 그저 안달하며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라지는 아직도 무사할까? 그는 여전히 저 명랑쾌활한 낙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의 광기 어린 행동을 떠받쳐주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변화(Change)를 외치는 오바마 새 대통령한테도 그 점과 관련해서는 큰 기대를 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 마침내 불의와 냉소주의가 승리하는 걸까?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와 그 국민이 저지르는 이 범죄를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유대인이 자행한 짓’이라고 한다면, 그 수사는 일면적일 뿐 아니라 사실에 반한다. 그것은 냉소주의를 고무시킬 뿐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는 엄밀히 구별해야 할 개념이다.
|
||||||
사라 로이(Sara Roy)라는 여교수가 있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하버드대학 중동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이다. 그는 ‘홀로코스트와 함께 살아간다’(Living with the Holocaust: The Journey of a Child of Holocaust Survivors)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홀로코스트로 다수의 육친을 잃은 그가 연구를 위해 이스라엘을 왕래하면서 어떻게 각성해갔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그는 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굴욕과 공포, 인간성 파괴를 체험을 통해 알게 되면서 자신의 부모세대가 나치 시대에 겪어야 했던 일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 지식인들은 대부분 전세계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 탄압, 불의에 반대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박해자인 경우에는 거기에 반대하는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중 기준(더블 스탠더드)은 이제 끝내야 한다.”
이런 유대인 지식인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는 것, 그게 말하자면 ‘희망’이리라. 사라 로이는 오는 3월 일본에 온다. 나와 공개 대담도 예정돼 있다. 나도 가자에서 싸우고 있는 벗 라지 슬라니한테서 불굴의 정신을 배워 ‘장기적 낙관주의’에 대해 뭐든 얘기하고 싶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20090208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