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의 21세기판 변주곡 / 강명관
(남편을 따라 죽은) 이씨와 같은 아내는 많았다. 하지만 어떤 남편도 아내를 위해 허벅지 살을 베거나, 종기를 핥지 않았다. 여성을 성적으로 지배하려던 남성의 욕망과 그 욕망의 제도화인 가부장제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씨의 머리에 그 제도를 윤리의 이름으로 집어넣은 것은 국가권력이었다.
이씨는 나이 열다섯에 고엽에게 시집을 갔다. 요즘 중학교 3학년 나이다. 남편은 병자였다. 병명은 모르지만 종기가 하도 심해 고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고, 오직 이씨만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병 수발을 들었다. 병세를 알고자 남편의 설사를 맛보았고, 고름을 빨았으며, 남편 대신 자신이 죽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기도 하였다. 그런들 소용이 있을 리 없다. 급기야 이씨는 머리카락을 태워 남편의 환부에 바르고,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구워서 남편에게 먹였다. 남편의 숨이 넘어가려고 하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서 남편의 입에 부어넣었다. 피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은 그렇게 목숨을 이어갔다. 7년이 흐른 뒤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죽고 만다. 상을 치르고 나서 이씨는 독약을 먹고 남편의 관 옆에서 죽는다. 스물두 살이었다. 열다섯에 결혼한 이씨는 7년 동안 어떤 행복을 누렸을까?
이씨와 같은 아내는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어떤 남편도 아내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 살을 베거나, 종기를 핥지 않았다. 아내를 따라 죽는 남편도 당연히 없었다. 이씨의 행동은 이씨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결코 아니다. 여성을 성적(性的)으로 지배하려 했던 양반 남성의 욕망과 그 욕망의 제도화인 가부장제가 이씨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씨의 머리에 그 제도를 윤리의 이름으로 집어넣은 것은 국가권력이었다.
의사는 눈을 싸고 있는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젊은 여성이 눈을 떴고 그 곁에는 여성의 아버지가 있었다. 아가씨와 아버지는 틀림없이 백내장을 고쳐 준 네팔의 산둑 박사(박사는 10일 안에 북한의 백내장 환자 1천명 이상을 수술하였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버지는 ‘수령님의 은덕’을 먼저 찬송했고, 딸도 그 방 정면 벽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에 큰절을 하면서 감격스런 어조로 감사의 말씀을 올렸다. 그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북한을 가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망극한 성은에 감격스러워하는 왕조시대의 신민을 보고 있었다. 김씨 부자에게 감사하는 그들의 행위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허위였을까? 아니 진정이었을 것이다. 그 진정은 닫힌 세상에서 이루어진 끊임없는 교육의 결과물일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1925년 카리브해의 인구 25만명의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1635년 프랑스는 이 섬을 식민지로 삼은 뒤, 원주민인 인디오를 축출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옮겨 주민으로 삼았다. 파농은 바로 이 흑인의 후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마르티니크의 주민이 ‘백인들끼리의 전쟁이니, 흑인들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하자, 파농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피부색과 관련이 없다’고 반박하고, 프랑스 군대에 자원 입대한다. 파농은 북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로 갔다가 프랑스에 상륙하여 전투 중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병원행을 거부하고 다시 부대에 합류한다. 그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 몸을 바쳐 파시즘과 싸웠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1946년부터 리옹대학에서 정신병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공부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프랑스어를 말하고 프랑스를 위해 싸웠어도 그는 멸시를 받는 흑인이었고, 결코 흰 피부의 프랑스인이 될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흑인’ 파농을 잊고, 스스로 흰 피부의 프랑스인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세뇌였다.
지금 이곳은 조선시대도 북한도 아니다. 식민지와 제국주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아무도 허벅지를 베거나 손가락을 끊거나 남편을 따라 죽지 않는다. 수술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도 않고, 피부색에 따라 사람값을 달리 매기지도 않는다. 몹쓸 세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라디오에서 김연아 선수 이야기가 나왔다. 운전하시는 분이 참 대단한 선수가 아니냐면서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분은 피겨 스케이팅이나 수영은 언제나 선진국에서만 1등을 하고 메달을 따는 줄 알았는데, 김연아·박태환 두 선수가 그런 성적을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거듭 열을 올렸다. 그분은 그렇지 않으냐고 내게 재차 동의를 구했고, 심드렁한 나의 동의에 그분은 같은 국민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이래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리저리 가지를 치더니, 급기야 그분은 자신의 어려운 형편까지 털어놓았다. 요약하자면, 한 달 죽어라 하고 일을 하여 버는 돈이 120만원이고,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아내의 월급이 70만원인데, 거기서 고등학교 1학년 아들에게 달마다 평균적으로 들어가는 50만원(등록금, 책값, 학원비, 용돈)을 제하면, 세 식구가 겨우 목숨만 이어갈 뿐이라는 하소연이었다. 하소연을 하던 중 길거리에 무슨 연말 음악회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것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자기의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오직 텔레비전을 보는 것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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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지요. 하나 있는 아들도 공부가 그저 그러니 어디 좋은 대학에 가겠어요. 나처럼 신발공장에 다니다가 택시 운전이나 하고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될지? 나는 왜 죽어라 일해도 이렇게 늘 못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문득 남편을 따라 자살한 젊은 열녀와 백내장 수술을 마친 북한 주민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파농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울 속으로 그분의 눈을 계속 보고 있자니, 참으로 민망하였다. 택시 창밖으로 얼굴을 돌리자, 초등학생들이 조잘거리며 학교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20081227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