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

보행

오직~ 2008. 12. 8. 01:46

 

 

마침 가파른 길이 끝나고 펑퍼짐하게 트인 개활지에 이르니, 그곳에는, 문득, 노오란 눈이 휘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 개활지를 사면에서 수호하기라도 하듯, 기십 미터는 족히 될 은행나무 네 댓 그루가 숭엄하게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생래의 기하학을 지닌 은행잎들은 노란빛을 사위로 털어내며 분분히 떨어지는데, 그 기세가 자못 하늘과 땅을 뒤덮을 정도였다. 나는 모종의 경외스러운 감상에 젖어 신발을 벗어들고, 그 황설(黃雪)에 온몸을 맡기며 한참을 우러러 서 있었다.

벗으며 떨어지며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구나, 제행무상(諸行無常)도 엑스터시일 수 있겠구나, 탈각(脫殼)이란 차마 성스러운 것이구나, 버리며 이루는 것이 우리 삶의 지극한 이치구나....., 나는, 그 까마득한 순간에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사념의 덩어리들을 아득히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념들은 내가 정녕 모르는 말 '공혜(空慧)'를 휘감아돌고 있었다...

 

 

운명과 타락 - "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지만, 날지 않으려 하는 것은 타락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발이 있었고, 그러므로 손이 생겼다."

사고가 뇌를 지배하고, 그 뇌가 손을 지배하고, 그 손이 발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가? 이제부터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산길을 나서 보시라. 그러면, 손(homo faber)과 뇌/사유(homo sapiens)의 분주한 교제가 발(homo erectus)의 터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손이 제아무리 날아다녀도, 결국은 발바닥 위에 있을 뿐.

 

 

대화! 명징한 논리와 아름다운 수사가 한데 어울려 찾아드는 그 이치의 소쇄(瀟灑)는 실로 정신의 오르가즘이 아닐까.

실로 모든 대화는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과 어휘를 교정하고 개선한다는 의미에서 '아이러니의 대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말이, 내 대화의 경험이 필경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야 대화의 진정성이 확보된다. 그리고 그 진정성이야말로 바로 아이러니의 요체인 것이다. 흔히 '만남은 무서운 것'이라는 표현을 써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데, 변할 각오가 없는 패권주의적 대화는 대화가 아니며, 부서질 준비가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정이 진리를 증거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긴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밀의 지적처럼, 열정은 오류의 꽁무니를 좇아다니는 데에도 이력이 붙었다. 어떤 사항이 아무리 강하게 믿어지더라도 그 가운데에 진리의 표지는 없다. 그리고, "그러나 그것들에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해서 대체 그 진리들이 위대하단 말인가?"라는 니체의 아이러니는 믿음의 허구를 냉정하게 파헤친다. 과학사의 상식이긴 하지만, 가령 진리를 좇는 데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던 루터는 바로 그 열정의 보복으로 인해 도리어 오류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되었다.

 

 

 

"신이나 진리의 문제들은 신이나 진리가 알아서 하도록 그들에게 맡겨두시게. (오죽 잘 알아서 하시겠는가) 당신들은 억압과 예속의 장치들을 적발하고 해체하면서 오직 자유의 문제에만 신경을 쓰시게. 앞길은 아득하고, 뒷산의 해는 벌써 저무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진리 속에서야 비로소 자유할 희망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오히려 자유의 구체적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한 걸음 한 걸음 속에서 성숙하는 길이 있을 뿐.

 

 

내가 바뀌지 않으면 내 그림자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사회의 특징은 기초가 부실한 가운데 첨단으로 현란하고, 과거를 적실한 평가나 대책 없이 청산한 가운데 새 것 콤플렉스에 시달리길 잘한다.

 

 

전망에 따른 계교지심(計較之心)이란 겨우 100년의 삶 앞에서 맹랑한 짓, 어찌 이 짧은 삶의 당위를 방기할 수 있으랴.

 

 

현란한 심오일수록 오히려 실질적인 나태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

 

 

인문적 성숙은 결코 '한계 너머'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그것은 '이곳'이나 '저곳'의 이야기도 아니요, '안'이나 '밖'의 풍경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아쉬운 대로 정리하자면, 성숙이란, 한계의 이름이요, 그 한계를 밀어내는 접선(接線)의 요동이며, 마치 조석의 간만처럼 내가 채워지고 비워지는 '사이'의 겹침이다.

 

 

천축을 찾는 자에게 천축은 없다. '천축'을 찾아간다면서 신발 끈을 매고 새 옷을 걸치고 출발선을 그리고 하는 이들은, 이미 그 공간주의적 욕심 때문에 머지 않아 망할 것이다. 다만, 천축을 찾는 길이 길어지면서 그 길은 내 마음속에 길을 만들고, 이윽고 그 마음속의 길조차 희미해지면서 내가 스스로 하나의 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안타까움 정도, 그리고 그 안타까움의 안타까운 실천이 있을 뿐.

 

 

'계몽 이상의 성숙' 혹은 '비판 이후의 소박'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무한이 오는 곳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한 번 태어나서

한 번은 꼭 죽기 때문이다

한 번만 사는 삶인데

한 번밖에 못사는 삶인데

여기, 이렇게, 아무래도 남루한 냄비 속이

너무 좁지 않느냐 하고

물음 대신, 울음 대신으로

저기, 저, 먼 곳을 끝없이 힘을 다해

훨, 훨,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

( 김승희 "견딤의 형식"中 )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진리란 결국 자가당착의 메타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가당착을 넘어, 다시는 자가(自家)에 당착(撞着)하지 않을 유토피아를 상정하려면 길이 끊어지면서 환한 '진리'가 현시되어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진리현시설(the theory of manifest truth) 따위를 믿을 수 없으며, 그리고(그래서)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경계없는 이 세상에 어디에도 자족의 쉼터란 없다. 하물며 내가 죽은 뒤 그 한 줌의 재마저 길의 일부가 되어 길손들을 스치며 지나다닐 것이니, 대체 어떻게 길을 넘어 자족의 안돈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걸으면서 말하기'라고 했듯이, 쉼과 걷기 사이에도 아무런 경계가 없어보인다.

"나는 흔들리면서 오직

길 위에 홀로 서 있음을"

 

 

 

권력자는 질투하지 않는다 : 그는 갈취하며 처벌하고 보복한다. 따라서 대체로 질투란 어떤 제스처며 어떤 그림자, 언어에 이르지 못하는 어떤 한숨과 같은 것이다. 현대와 같은 개방 사회 속에서는 그 역학이 한결같지 않으나, 질투가 사회적 약자의 자기 방어 기제이자 소극적 대응 전술이라는 사실은 일상적으로 획인된다.

 

 

 

친구, 그 사적 의리(義理)의 폭력 혹은 그 섣부른 야합.

 

친구에서 동무로 :

동무는 '화끈한'

친구의 길을 철저하게 메타화한 것이며, 그 메타성을 아래로 끌어내려 역으로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긴 전망을 세우되, 짧게, 짧게 실천하는 길이다.

화끈해서, 말조차 녹아내리는 사사화된 침묵의 공간은 동무의 길이 아니다.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그 '접촉'의 이치에 말없이 투항하는 공간은 동무의 길이 아니다.

끈끈하지 않아도 진지하고, 화끈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으며, 멀리 있어도 긴장하며, 만나지 않아도 대화하는 사이, 그 기묘한 사이 속에서 동무의 길은 자생한다.

그 길은 '현명한 근기(wise sustainability)' 의 길이며, 참을성과 지닐성이 시간성 속에서 조리(調理)된 길이며, 재기(才氣)가 도근(道根) 속에서 팽창하고 도근이 재기 아래서 수축하는 길이다. 그 길은 무거우나 답답하지 않으며, 가벼우나 섣부르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은 흔들리면서 오래 걷는 길이며, 자빠지면서도 격(格)과 멋을 잃지 않는 길이다.

늦가을의 노을처럼, 그것은 '지면서 아름다운 길'이다. 숯불처럼, 검은 데에서 빛나고, 어두운 곳에서 더욱 유혹적인 길이다. 그것은 물러서면서 되려 긴장하고, 다가서면서 집요하게 부끄러워하는 길이다. 이 길을 말하면 저 길을 무시하려는 당신은 결코 내 동무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냉소는 해결도 아니고,,,,,아무 것도 아니다. 대체로 그것은 디오게네스의 그것처럼 처절한 구도(求道)의 부산물도 아니다. 특히 주변에서 목도하는 그것은 이 자본주의적-관료적 인정 투쟁에 피폐해진 나머지 빠져드는 수동적 폭력성에 지나지 않는다.

냉소주의에 빠진 냉소는 마치 표절로 흘러내리는 패스티시처럼 자멸을 가지고 노는 강박적 자학과 유사하다. 권위 전체를 무분별하게 권위주의로 매도한 채 자기 혼자 흘리는 냉소는 인문적 삶의 지긋한 형식으로 내려앉지 못한다.

 

 

 

 ☆ 보행

      -  김영민 -

 

철학의 언어로 글쓰는 작가는 詩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