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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는 없다, 지금의 나만 있을 뿐

오직~ 2008. 8. 18. 00:24

민병국의 <가능한 변화들>(2004): (불)가능한 변화

 

1. 민병국이 내놓은 제작의 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내면적 변화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그 가능성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가능한 변화’를 ‘(불)가능한 변화’로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인간의 내면적 변화! 슬픈 얘기이긴 하지만, 인간은 ‘내면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한결 낫습니다. 진정 인간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오히려 ‘내면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하며, (내 식으로 말하자면) 그 ‘내면’이라는 게 마치 없는 듯이 행위해야 합니다. 저도 2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노릇을 하면서 이 ‘노릇’만으로는 이들의 ‘버릇’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절감하곤 했습니다. 노릇이 바뀐다고 버릇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내면’을 바꾸려 하는 한 영영 바꿀 수 없을 겝니다. 2. 문호(정찬)의 대사 중에, “이 고기 말이에요, 사실은 죽은 살이 타는 건데 냄새가 너무 달콤해요”라는 게 평자들의 주목을 끌었지요. 그런데 달콤한 것은 차라리 반복이지 변화가 아닙니다. 자아(에고)가 진리를 억압하듯이, 우리의 몸은 변화에 저항합니다.

 

채팅으로 연락하던 남녀가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역시 ‘처음’으로 묻는다. “전에도 채팅하다 만난 적 있으세요?” “아니오 ‘처음’이에요.” “저도 ‘처음’인데 ….” 뒤의 ‘처음’이라는 거짓말은 앞의 ‘처음’이라는 사실에 기생한다. 쾌락이 무지에 기생하는 일반법칙처럼, 처음으로 만났기에 이들은 ‘처음’이라는 쾌락의 낱말을 뻔뻔스레 사용한다. 이처럼, 나날이 새로워지는 바로 그 힘으로 나날이 늙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네의 세속이다.

 

어느 철학자가 세인(世人, das Mann)이라고도 이른 이 범인(凡人)들은 처음이라는 매번의 우연과 그 기회를 역시 처음이라는 거짓말로 오염시킨다. 자신에 대한, 자신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거짓말이 어느덧 진지해지면서 내면화되면, 그것은 ‘허영’이 되고 그는 속물이 된다. 그리고 이 허영의 주체는 도시자본제적 삶의 체계 속에서 바람처럼 흘러다니는 우연의 가능성을 놓친다. 이 대목에서는 진리(진실)를 ‘마주침’이라는 사건적 우연성 속에서 찾는 사상가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럴진대 만남 속의 우연을 ‘처음인데요!’라고 얼버무리면서 외면하는 짓은 참으로 슬픈 노릇이다. 흙 속에 숨은 보석을 놓치는 일이야 조금 아까울 뿐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주듯이) 내 마을로 찾아온 신을 쫓아버리는 짓은 정녕 치명적!



<가능한 변화들>에서는 허영을 체질화한 지식인 속물들이 주인공이다. 종규(김유석)는 젊은 나이에 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게 되고, 첫사랑인 수현이 자신을 거부한 것도 어쩌면 자신의 불구 탓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교수직을 향한 꿈은 좌절당한 채 별로 연구할 것도 없는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마치 물 밖에 나온 문어처럼 징그러울 정도로 그의 일상은 권태롭다. 일견 그가 진정으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주변에 걸려드는 여자들인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에 대한 그의 졸렬한 태도는 상처의 이기심을 먹고 살아가는 남자의 허영(내 상처는 보다 깊고 ‘독창적’이라는 허영!)에 특징적인 것이다. 아니, 그의 태도는 실은 자본제적 삶의 마당 속을 효율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 내내 숨기거나 모른 척해야 하는 정서의 고향을 설핏 드러낸다.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종규, 그 상처를 빌미삼아 속물스러운 현재의 삶을 정당화하고 순정의 진실을 찾아 첫사랑 수현의 주변을 끊임없이 기웃거린다. 그러나 수현과의 재회에서 드러난 진실은 오늘의 그 낡은 버릇 외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기든스(A. Giddens) 등의 근대 비판가들은 남자가 자신의 객관적 성취를 위해 숨기고 있던 그 ‘정서의 지지대’(emotional prop)를 지적한 바 있다. 또 그것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점점 잦아지는 도시적 경험 속에서 현대의 남녀관계가 겪는 구조변동을 말하기도 한다. 어머니나 아내의 충실과 그 정서적 지지를 당연시해오던 가부장제 속에 남자들은 그 지지가 철회되거나 혹은 그 지지의 빈 속을 경험하는 황당하고 뼈아픈 체험을 겪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은폐된 부분을 인식·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성찰성’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른 채 의지하고 있던 것을 깨닫는 일이다. 혹은, ‘작은 것을 보는 것 속에 밝음이 있다!’[見小曰明]. 위니콧(D.W. Winnicott)을 위시한 여러 심리학자들은, 가족이나 연인과 같은 근본적·1차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제공하던 정서적 지지가 없어지거나 훼손될 경우 그 당사자(특히, 남자)는 이후 단발적이며 피상적인 애정관계를 전전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깊고 지속적인 정서의 관계를 믿지 않거나 혹은 아예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세속에서 성숙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곧 1차적 애정관계에 대한 근본적이며 진득한 신뢰에 의지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분석에 일리가 있다면, 종규와 같은 지식인 속물의 태도는 우선적으로 자기보호적이다.

 

상처받은 종규, 아니, (정확히는) 상처받았다는 ‘생각’에 골몰하는 종규는 바로 그 상처라는 이기적 울타리 속에서 한 사람을 진득하게 사랑하는 신뢰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 애인을 두고 임신까지 시키면서도 그는 마치 발정난 개처럼 아무 여자에게나 침을 흘리며 수작을 건다. 바람둥이인 그의 여자관계는 삽화나 징검다리와 같은 꼴을 취할 뿐이다. 프로이트의 낡은 설명처럼 스스로 그 상처의 경험을 안전하고 약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하는 내적 강박이거나, 혹은 원초적 상처의 그늘 아래 근기 있는 친밀성의 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종규가 수현에게 드러내는 태도는 그가 지닌 상처의 성격, 그리고 과거의 그 상처가 그의 현재에 어떤 빌미로 쓰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종규는 첫사랑(수현)의 상처를 품은 채 그녀의 주변을 강박적으로 맴돈다.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이 첫사랑의 실패는 그를 불구로 만든 사고와 상상적으로 결부되면서 이후 그의 인간(여자)관계를 결정짓는 초석적 사건처럼 작동한다. 이 바람둥이의 삽화적 관계는 전술했듯이 상처를 회피하기 위한 자기보호장치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허용하는 보상적 쾌락의 형식이기도 하다. 종규는 첫사랑의 실패를 상처의 진원지로 ‘생각’하면서 그 첫사랑을 되찾으려는 강박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그는 영혼이 메말라가는 해바라기처럼 수현의 곁을 실없이 맴돈다. 이를테면 종규는 수현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의 진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빌미 삼아 손에 닿는 대로 아무 여자나 집적이지만, 늘 첫사랑을 향해 되돌아가는 그의 상처는(정확히는, 상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신의 비루한 방탕기를 정당화한다. 순정의 진실을 수현에 의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한, 그가 그의 현실을 어떤 타락한 식으로 살아내든 그것은 이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처는 곧 어리석음”(아도르노)이라는 오래된 격언은 종규의 경우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경우 ‘수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상처는 그의 진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종규의 현재를 미봉하거나 분식하는 알리바이로서 기능한다. 결국 수현은 그의 진실이 유예/유배된 곳이 아니라 다만 잃어버린 쾌락의 지점에 불과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수현과 동침하게 되는 진리(!)의 순간에 명백해진다. 종규는 바로 그 진리의 순간에 그간 유예하거나 상상해왔던 자신의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다. 수현의 나신 앞에 종규는 여전히 치졸하고 고집스러울 뿐이다. 수현과의 합일을 통해 그가 또다시 증명한 진실은, 그의 현재를 구성하는 그 낡은 버릇 이외에 아무런 진실이 없다는 진실이다.

 

김영민 철학자

20080816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