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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비)우면서 배우기 / 김영민

오직~ 2007. 9. 9. 21:56

어느새 20년이 가까운 내 교학(敎學)의 생활에서 조금 색다른 체험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가지는 근 10년 동안이나 30~50살 안팎의 만학도들과 씨름(!)한 일이다. 또 한 가지를 들자면 잦은 초청강연 탓에, 그리고 대학 밖의 대안학교 운동에 열심을 부리는 중에, 전국 각지의 학생, 독자들과 동시다발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영호남의 학인들을 지적·정서적으로 세밀히 비교할 수 있는 갖은 경험이나 정보들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축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지면을 통해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만학도를 접하고 지도하면서 깨단한 사실의 하나는 특히 그들의 글(쓰기)이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 글쓰기 문제만을 다룬 2권의 연구서를 펴낸 바 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시 특별히 이 이슈와 관련해서 실없는 명성을 얻은 바 있던 차, 나는 평소 교실의 안팎에서 읽기나 따지기 못지않게 쓰기를 내내 강조했건만 이들 만학도들은 내 열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글쓰기라면 죄다 거북이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글쓰기는 관념 이전에 개인의 생활양식 속에서 만들어진 몸의 문제다. 이 몸과 버릇 속에 각인된 과거를 고집하는 한, 공부도 변화도 성숙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글쓰기 공부는 이러한 덫을 제어하고 몰아내는 끈질긴 노력을 바탕에 둔다. 비우지 않고는 담지 못하며 지우지 않고는 배우지 못함을 명심하라”

 

교학상장의 열성과 성실 속에서라면 학생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생각의 집을 허물거나 다시 짓는 것은 아주 힘든 노릇은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아무래도 무엇인가 달랐다. 마치 그것은 납덩이를 품고 헤엄을 치는 듯 의식적인 노력을 단번에 무화시키는 어떤 절망의 닻/덫에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글쓰기에 관한 한, 심지어 달변도 다독도 별무소용이었던 체험이 이어졌다.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경상도의 글자가 전라도의 소리가 아니듯이 글(읽기)은 (글)쓰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글)쓰기는 관념 이전에 몸의 문제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치게 되었다. 나아가서, 몸의 성격과 그 길은 결국 그 개인의 생활양식 속에서 조형될 수밖에 없는데, 어느 정도의 나이에 이른 만학도의 경우 그간 고착된 생활양식의 코드들이 몸을 타성적으로 규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글쓰기 공부에서 치명적인 결정인자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글쓰기 공부에 국한시킨다면, 특히 마흔을 넘긴 사람은 좀처럼 스스로를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한 어느 유명한 정신분석의의 진단에 나 역시 못마땅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이다.

 

지연이나 학연에서 독립하는 것을 내 공부길의 바탕으로 삼으며 그 어느 곳이든 타향으로만 여겨오던 나로서는 영호남을 가르는 지역감정의 벽은 곧 적이었다. 실은, 내 앞에서 무심코라도 그 같은 지역정서적 편벽을 드러낸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말이나 심지어 생각이 아니라 몸의 길, 동선(動線), 취향, 그리고 생활양식의 선택에서 우회적으로 드러나는 지역정서적 뿌리였는데, 이것은 이미 관념적, 문자적 계몽의 차원을 비껴가고 있었다.

 

나는 글쓰기나 지역감정과 같은 문제는 그 근본에서 몸의 역사와 생활양식에 닿아 있다고 본다. (시쓰기를 존재의 닻으로 여긴 김수영이 바로 그 시쓰기를 생활의 양식과 결부시킨 사실을 되새겨 보자.)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 계몽의 물결이 비록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더라도 이윽고 그것은 다시 썰물이 되어 빠르고 실없이 철수하고야 마는 것이다. 내가 만학도들에게 철학과 인문학을 강의하면서 부딪치곤 했던 그 철옹성 같은 벽은 관념의 조수간만으로는 끄덕도 하지 않는 나이와 경험의 타성이자 몸과 생활의 무게였을 것이다. (아예, 몇몇은 ‘교수님, 아이를 낳고 길러봐야 진정한 철학을 하지요!’라고 일갈했다.) 그 벽은 실로 닻이면서 덫일 수밖에 없는데, 몸과 버릇 속에 각인된 과거를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든든한 닻이 되고, 공부라는 미래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것은 그만 끈끈한 덫이 되어버린다.


공부를 관념들을 섞는 재주로나 글자들을 이어붙이는 재주로만 보아서는 큰코다친다. 그 재주의 바깥을 제대로 챙기지 않고선 그 재주의 성격이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앞서 예시한 대로, 글쓰기나 지역감정은 단순히 글과 감정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바깥’에는 버릇과 생활양식이라는 몸의 문제가 닻처럼, 혹은 덫처럼 엄연하고 악착같이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경상도에 태어나 살면 영남의 지역정서를 공유하게 되고,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처럼) 적대적인 군중 속에 섞이면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되는 일! 이 같은 종류의 덫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공부도 변화도 성숙도 연대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부는 내 몸의 역사와 생활 탓에 생긴 덫을 제어하고 몰아내는 끈질긴 노력에 바탕을 둔다. 나는 이것을 오래전부터 ‘지우면서 배우기(learning by way of unlearning)’라고 불러왔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1897)에는 내가 지금도 욀 수 있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배운 것을 떨쳐버리는 작업은 실로 느리고 어려웠지만, 진실로 그것은 교육의 시초였다.” 물론 전통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마음자리가 없을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과욕일 뿐이다. 그러나 비우지 않곤 담지 못하며, 지우지 않곤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공부란 진지한 것이며, 반드시 비용이 드는 것이며, 나와 주변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배운 것을 잊어버리기에 열중하겠다. 나의 내부에 침잠된 문화, 신념 따위에 망각을 부여함으로써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의 수정상황에 흔쾌히 몸을 맡기겠다.”  (롤랑 바르트)

 

김영민/철학자

20070908한겨레